엎드려 입을 맞추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소에 관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합니다. 창녀 마리아는 마귀에게 자기 몸을 구별하여 바쳤던 마귀의 성소(소굴)였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을 보면, 창녀 마리아는 본래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마귀의 집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그녀가 살았던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있던 전통적인 유곽지역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나그네와 뱃사람에게 술과 몸을 파는 여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에서 그녀를 구원하시고 그녀의 고향인 베다니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누가복음 7장 36〜37절에 다시 등장합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그 ‘죄인인 한 여자’라고 불리는 여자가 예수님께서 그 집에 오셔서 식사하신다는 소리를 듣고 몰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38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예배하다’, ‘경배하다’는 말은 동일하게 ‘엎드려 절하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구약에서는 ‘샤하(שָׁחָה)’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엎드려 절하다(bow down)’라는 뜻의 동사입니다. 신약에서는 ‘프로스쿠네오(προσκυνέω)’라고 하는데 ‘프로스-’는 ‘앞으로-’라는 뜻이고 ‘쿠네오’는 ‘입을 맞추다(kiss)’는 뜻으로 ‘앞으로 엎드려 입을 맞추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이해하려면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리는 창녀가 그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입을 맞추고 한없이 우는 모습을 떠올리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로써 그녀의 죄를 용서하고 또한 오라비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으므로 마리아의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로부터 그분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씀을 듣자 깊은 사랑과 슬픔으로 그분께 경의를 표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크게 희생하여 그분의 몸에 부을 “값진 향유” 한 옥합을 샀습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은 그분께서 왕이 되시려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하였으며 제일 먼저 주께 영광돌리기를 열망하였습니다.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써 발을 적시고 길게 물결치는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온전한 예배였습니다. 정확하게 엎드려 입을 맞추고 예물을 드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거룩이 거룩을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별하여 우리에게 바치셨을 때 하나님의 구별하여 주시는 그 사랑을 받아서 다시 우리도 그 사랑에 자신을 구별하여 바치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는 거룩한 존재들의 잔치입니다.
남성들에게 한두 푼에 몸을 팔던 창녀가 말 그대로 주님께 몸과 마음을 바치는 성녀로 바뀐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용서받은 죄인들이 자기들의 몸과 마음을 다시 주님께 온전히 구별하여 바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그 제물을 받고 용서받은 죄인들이 이제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거룩한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순환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죄인만이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용서받은 죄인만이 자신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이는 온전한 예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 교만과 더러운 정욕이 다 폭로되어 더러운 죄인이 되고, 그래서 까발려진 그 모든 죄가 다 용서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자기를 구별하여 주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자신을 구별하여 예수님께 바침으로 예수님께 귀한 성소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누가복음 8장 2절
- 누가복음 7장 36〜3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