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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대로 되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소경도 있었고, 절름발이도 있었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늘 하셨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네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변하지 않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동시에 사랑을 맛본 사람들이 그 사랑에 자신을 맡기는 믿음으로 치유가 일어나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을 고치신 말씀이 나옵니다. 12년을 소위 피를 흘리는 혈루증, 무슨 병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생리적인 문제였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병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혈우병이 아니었을까, 혹은 혈액암이 아니었을까 여러 가지 해석들을 내놓고 있습니다만, 정확히 어떤 병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한 건 혈액과 관련된 질병이며, 환자가 그 고질적인 질병으로 오랫동안 가산을 탕진하고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다는 것뿐입니다. 정확하게 나오진 않지만, 아마 남편이나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이야기를 들으며 “그 마음속에 그 겉옷만 만져도 내가 구원을 받겠다.”(마태복음 9장 21절)는 믿음과 희망이 그녀의 가슴 속에 싹텄습니다. 소경과 절름발이를 고치셨다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으면서 ‘아, 이분은 절대로 나를 거절하지 않을 분이다.’라는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녀의 확신은 대담함으로 변했습니다. ‘저분은 내가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될 것이다.’ 은혜가 오지 않으면 아무리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만지려 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일부러 이 여인 옆으로 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만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기어코 가야 되겠다는 믿음은 이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께 손을 뻗게 했고 곧장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4절의 말씀을 보면, 문둥병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제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때문에 ‘문둥병자’라는 통속적 표현보다 ‘한센병 환자’라고 말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문둥병자들은 마을 밖 고립된 지역에 함께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문둥병이 혐오스럽다고 느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돌아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만일 마을에 문둥병자들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부정하다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돌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가야할 경우에는 문둥병자들 스스로 크게 소리를 질러야 했습니다. “더럽다! 더럽다!” 그렇게 해서라도 정상인들이 먼저 알고 자기를 피해 가도록 알려야 했습니다. 당시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막 산상수훈을 하고 내려가는 예수님을 쫓아오는데 그들 앞에 문둥병자가 나타났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길가에 돌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문둥병자는 숲속에서 숨어 예수님께서 길을 지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병자들을 고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문둥병자는 마음속에 자그마한 확신이 싹트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한테 맞아 죽을 걸 각오하고 용기를 내어 뛰쳐나갔습니다.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마태복음 8장 2절)
사람들은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내었을 그 때,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라.”(3절) 하셨습니다. 여기 표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네” 소원이 아니고 “내” 소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우주의 천천만만의 천사와 거민들의 찬양과 경배를 뒤로하고 더러운 죄의 땅에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쓰시고 오신 그분이 오로지 그를 구원해 주기 위해 혐오스럽게 뒤틀린 육체에 손을 대셨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문둥병은 하늘이 내리는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누님이었던 미리암, 엘리사의 종 게하시 등 구약에 문둥병을 하늘의 저주로 여길만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문둥병을 허락하셨을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느니라.”(로마서 5장 20절) 왜 예수님께서 그들을 저주하셨을까? 그것은 정녕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사람들에게 무시와 멸시를 당하고 짓밟힘을 당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벌레 같은 취급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깨닫고 동시에 그런 죄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여기 분명히 “예수님이 손을 대시며”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는 이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게 그에게는 도리어 특권 아니었을까?
성경구절
- 마태복음 9장 21절
- 마태복음 8장 1〜4절
- 로마서 5장 2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