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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예수님과 죄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다
이번 글에서는 순종과 믿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믿음이라는 단어 속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신 결과로 ‘행함’이 이루어진다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함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순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18〜19절에는 이런 말씀이 등장합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여기에 보면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왜 순종하지 못했을까요? 바로 뒤이어 ‘저희가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순종과 믿음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다 맡길 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 2장에 등장하는 ‘행함’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먼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의지와 동의를 구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 다 맡길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로 순종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곧 순종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인 신랑이 자신을 한없이 사랑해 줄 때, 그 사랑에 자신을 맡긴 신부는 그 신랑으로 인하여 자녀를 낳게 됩니다. 신부 혼자 자녀를 가지고 낳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랑이 자신을 주지 않으면 생명은 탄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지 않으면 절대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7절에 보면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본래 이 ‘목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푸쉬케(ψυχή)’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푸쉬케’는 사람이 가진 육체적 생명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네페쉬(נֶפֶשׁ)’라는 단어가 됩니다. 이 ‘네페쉬’는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창세기 2장 7절에서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설명한 부분에서 사람의 존재 자체를 뜻하는 ‘생령’의 ‘령=영(靈)’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푸쉬케’와 ‘네페쉬’ 둘 다 ‘숨을 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숨을 쉬는 존재를 성경에서는 흔히 ‘생명’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목숨을 주신 예수님께서 죄로 인해 죽게 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주시고 나서 끝난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내가 생명을 너희에게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ζωή)’라고 하고, 히브리어로는 ‘하이(חַי)’ 혹은 ‘하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생명’ 그 자체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다 똑같이 생명이라고 번역하기는 하지만 요한복음 10장 17절 같은 경우에는 한글 번역이 더 제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목숨’은 말 그대로 ‘목숨’입니다. 목에 붙어 있는 숨, 즉 육체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결국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영원한 생명을 만드는 공식입니다. 생명은 사랑이 만든 열매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강제하지 못하는 사랑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문을 열어 드릴 때입니다. 강제 없는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사도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던져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용서의 두루마기는 죄를 가리는 두루마기가 아니고 죄를 버린 벌거벗은 죄인을 덮어주는 두루마기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과 죄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우리가 죄를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다 맡기는 믿음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지금 당장 예수님께 달려가 우리의 죄를 모두 맡기는 주의 자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히브리서 3장 18〜19절
- 야고보서 2장
- 요한복음 10장 17절
- 창세기 2장 7절
- 요한복음 10장 10절
- 요한복음 3장 16절
- 요한계시록 3장 20절
- 요한복음 1장 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