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오디오 듣기(팟캐스트, 데이터 주의)
죄는 자기만 사랑하는 것
이번 글에서는 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죄란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상황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8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한 로마서 2장 14〜15절에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없는 이방인도 양심이 있는데 이 양심을 가리켜 마음에 기록한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기록되어져 있는 상태를 양심이라고 성경은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던 사랑이라는 법이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도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기록되어 하나님과 우리가 똑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이것을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받은 아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을 때 그 하나님의 형상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마음에 기록한 하나님의 사랑의 법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우리가 새로운 사람으로 재창조될 때 본래 우리 마음속에 있던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우리 안에 다시 회복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 마음에 기록해 주셨던 사랑의 마음, 사랑의 법이 망가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마귀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파괴하고 우리 마음속에 자기사랑이라는 새로운 법을 마귀가 기록해서 자기사랑의 법에 의해 우리의 삶이 꼴 지어져서 우리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유전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유전자(DNA)’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자기사랑의 법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유전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전자를 부모로부터 받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바뀝니다. 물론 타고난 본성과 유전자에 본인이 최선을 다해 선하게 살고 착하게 살려고 하는 만큼 약간의 변화는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타고난 유전자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다음의 성경절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예레미야 13장 23절) 표범이 그 반점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죄인이 타고난 본성으로 인해 자동으로 짓게 되는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불가능하다고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 죄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성격은 자기를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요한일서 3장 4절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첫째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다시 말해서 네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이번에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40절에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신 이 두 계명 위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들이 걸려있다고 설명하십니다. 곧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모든 율법의 기둥과 같은 근본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를 공경하는데 의무적으로 공경하고 사랑했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정말 부모님을 사랑해서 공경했는지가 부모를 공경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친정 부모는 마음으로 공경하지만 시부모는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공경한다고 합니다. 마음속에 시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 우리 모두의 마음이 타락하고 변질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의 유전자가 죽어서, 사랑하라 공경하라 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복을 못 받고 잘못하면 지옥에 가고 멸망할까봐 두려운 생각에 부모를 공경하기는 하는데 그런 공경은 사랑 없이 하는 공경입니다. 그렇게 부분적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라고 문자적으로만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속에 있는 근본적인 본성으로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그것이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불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심판의 기준은 우리 속에 있는 본성입니다. 그 본성이 사랑이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도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도둑질도 하지 않고, 거짓말도 안하며, 살인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에 세 가지가 있는데 우선 사랑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입장에서 본 반대말로 첫째는 ‘미움’, 두 번째는 ‘무관심’이 있고 세 번째로 사랑한다는 긍정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적극적인 반대말이 되어 버리는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본성부터 악한 우리 안에는 이 세 가지가 다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에서는 꽤 높은 수준의 도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세상 도덕보다 더 높은 율법의 요구는 무관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동정을 베풀고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떡은 내가 먹고, 니 떡은 니가 먹는다”고 말하면서 “열심히 일해서 정당하게 월급 받고 내가 수고한 대가에 대해 누리고 사는 게 왜 죄가 되냐?”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즉 성경의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내가 번 돈을 결코 나 혼자만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다보면 자기가 번 돈이 다 없어져도 부족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에 사랑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야.” 이렇게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무관심한 자신이 떳떳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움보다 더 무서운 죄가 무관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3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것은 사단이 하는 짓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옳다고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끔찍하고 무서운 죄가 갈 데까지 가는 최종적인 모습, 즉 ‘반역’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사랑하지 않는 것을 불법이라고 말하지 않고 반대로 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죄악에서 벗어나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히브리서 8장 10절
- 로마서 2장 14〜15절
- 창세기 1장 26절
- 예레미야 13장 23절
- 요한일서 3장 4절
- 마태복음 22장 37~40절
- 마태복음 23장 23절
- 로마서 1장 3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