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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기가 막힌 죄악의 본성을 가진 죄인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거듭난 경험을 한 후에도 죄를 이기지 못하고 죄와 더불어 싸울 때마다 죄에게 끌려가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과 우리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죄의 본성에 대하여 계속 살펴보고자 합니다. 유명한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로마서 7장 25절)
사도는 말하기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마음’은 헬라어로 ‘누스’라는 단어입니다. ‘누스’는 본래 ‘이성(理性)’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서 헬라철학에서는 자동차의 운전대와 같이 우리의 정신적인 활동을 통제하는 것을 말할 때 사용하는 핵심 단어입니다. ‘누스’는 마음 또는 그 본질로서의 정신, 곧 이성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여 왔습니다. 이 ‘누스’라는 단어는 구약을 번역할 때 ‘영’을 뜻하는 ‘루아흐’를 의미하는 단어로 가끔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나오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에서 쓰인 ‘마음’이라는 단어도 똑같은 누스입니다. 우리 한글 번역은 ‘마음’이라고 번역했지만 본래는 ‘이성’이 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 전체적인 정신의 중심축이 바로 누스(마음)인데 이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말은 거듭남, 즉 ‘창조’를 뜻하며 ‘거듭난 새로운 본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스가 바뀌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로마서 7장 22절의 말씀과 같이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결단코 이런 영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타고난 우리 육신의 본성, 곧 근본적인 죄의 본성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절대로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절) 바울은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응시하게 됩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절)
왜 하나님께서 거듭난 사람 안에 이 죄악의 본성을 남겨 두셨을까요? 첫째로, 에베소서 3장 18〜19절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는 말씀처럼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하심을 깨달아 알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예수님의 용서의 바닥에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의 본성을 깨닫는 만큼 우리가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좀 더 깊이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가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커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는 가끔 기도할 때 눈앞에 십자가가 너무 크게 다가와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직면하기가 너무 힘들어 울부짖다가 쓰러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아는 만큼 밖에는 모르게 됩니다. 이는 용서의 깊이를 알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는 은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성화의 경험은 회개의 바닥, 즉 우리의 죄악의 본성으로 내려가는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경험이 결코 아닙니다.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인간은 더 밑바닥으로 내려갈 뿐입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 우리의 삶이 점점 변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도 정확히 말하면 허선(虛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사람이 외적인 높은 수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의 바다 속으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기가 막힌 죄악의 본성을 가진 죄인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성화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잘못된 성화의 이야기는 항상 외적인 변화를 중시합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거룩한 옷을 입고 예모 단정한 말씨를 쓴다고 해서 성화된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왜 하나님께서 죄악의 본성을 남겨 두셨을까요? 만약 우리 속에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을 하나님께서 다 없애버리셨다면 우리는 순간 우리의 죄가 생각나지 않는 상태, 그래서 계속 사랑과 선한 것만을 생각하는 천사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랑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사단은 악의 화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을 완전히 없애 버리면 우리 또한 작은 마귀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타락한 바로 그 지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우리 안에 죄의 본성이 살아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성경구절
- 로마서 7장 25절
- 로마서 12장 2절
- 로마서 7장 22절
- 로마서 7장 15절
- 로마서 7장 17절
- 에베소서 3장 18〜1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