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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로 인하여 영원히 돌아가신 아버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신 아버지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신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다는 개념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존재 위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아버지의 영원한 저주와 심판을 받으신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은 이미 십자가에서 완료되었습니다. 지구 역사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은 이미 죄를 끝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의 은혜(우리 대신 사형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끝내신 그 은혜)를 죄인이 믿음으로 받아들였는가 거절했는가를 심판하는 심판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오늘이, 예수께서 이루어 놓은 구원과 끝내 놓은 심판을 인정하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우리 개인의 종말의 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과연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거절할 것인지를 매 순간, 지금이라는 오늘 바로 이 순간에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이, 현재라는 시간이 은혜의 순간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법적 죽음, 예수님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죽음을 당하신 사실을 다시 한 번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통해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죄인에 대해 죗값으로 죽음을 요구하며 반드시 죄 없애야만 하는 것입니다. 죄와 하나가 된 죄인을 반드시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죄가 이미 죄인 안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죄와 죄인은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은 반드시 죄와 함께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요구하는 죽음을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죄인 대신 심판을 당하시고 죄와 함께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죗값을 갚을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본성을 끌어안으시고 다 끝내셨습니다. 죄의 열매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까지 함께 다 지고 가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죄를 죄의 결과, 곧 우리의 밖으로 나타난 행동과 말만을 가지고 죄라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의 뿌리까지 아울러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다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죄는 다시 반복될 수 없습니다. 죄의 값을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온전히 다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반복하자면 이 죽음은 둘째 사망, 영원히 부활이 없는 사망, 영원한 사망입니다. 놀라운 희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영원히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거듭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가 만드신 당신의 아들과 딸들의 모든 잘못을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다 짊어지고 다 책임지고 영원히 없애신 것입니다.
이를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장 6절)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영원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이 직접 우리를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부모가 되십니다. 중국에 『서경』이라는 공자님이 남긴 문헌에 보면, 실제로 ‘상제(上帝)’(중국어로는 ‘샹띠’), 위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중국 고대인들이 상제를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이사야처럼 중국에서도 많은 선지자, 예언자, 의인들이 하나님을 부르고 찾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감히 에덴동산에서부터 인류의 조상이 우리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타락하고 변질되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아저씨’로 변한 느낌입니다. 돈 만들어 주는 아저씨, 버튼만 누르면 현금이 나오는 ATM, 복을 주시는 산타크로스 아저씨, 병 고쳐주는 박사님 등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너무 슬픈 현실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죄를, 영원한 사망을 책임지시고 자식을 위해 사망을 끌어안으신 분입니다. 얼마 전에 아들을 꼭 껴안고 죽은 멕시코의 한 아버지에 대한 기사를 뉴스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아들을 끝까지 놓지 않은 부성애가 절절하게 느껴서 코끝이 시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살리시고 당신만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가 돌아가야 할 곳은 아버지의 품입니다. 교회가 물질적으로만 번영하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새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라는 아저씨, 세상의 쾌락과 행복이라는 아저씨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잘 되는 나, 번영신학, 삼박자 구원론과 같이 복음을 물질로 바꾸는 설교가 강단에서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이사야 44장 22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이유와 근거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이유는 세상의 쾌락과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해결하신 우리 아버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영원히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가장 간절하고 가장 큰 소원입니다. “난 됐으니 너 많이 먹거라.” 식탁에 오랜만에 올라온 자반고등어를 우리 앞으로 밀어주시는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난 괜찮다. 너만 행복하면 된다.”
요한복음 12장 27〜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성전에 서셔서 양이 죽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면서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외치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말할 수 없이 힘들고 괴롭사오니, 아버지, 길이 있다면, 이 십자가의 영원한 죽음을, 제가 짊어질 자식들의 죄, 그리고 죽어야 될 영원한 죽음을 면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이분이 바로 이사야 9장 6절에 예언되어 있는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아버지의 용서의 가슴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다시 한 번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고린도후서 5장 21절
- 고린도후서 6장 2절
- 갈라디아서 3장 13절
- 이사야 9장 6절
- 이사야 44장 22절
- 요한복음 12장 27〜2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