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살인하지 말라

by blogstar posted Jan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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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지난 시간에 이어서 마태복음 5장 21, 22절 말씀,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우리가 이제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재해석 하셨는지 보게 된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 계명을 읽을 때에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읽어왔다. 그런데 이 말씀, 이제 앞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보겠지만 이 계명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하신 마태복음 22장 37절로 40절의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이 걸려있는 기둥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마태복음 22장 40절에 특별히 두 계명 위에 모든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의 모든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걸려있다고 이렇게 주님께서 설명하셨는데 이 부정적인 명령 ‘하지 말라’는 그 말씀의 긍정적인 측면인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살인죄가 아니라고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여기 21절“옛 사람에게 말한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물론 십계명 자체를 문자로 보면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나 구약의 여러 말씀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면 많은 이야기들이 구약 성경에 이미 기록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마태복음 22장 39절의 말씀 또한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이미 구약에 있다. 없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이 새로 만드셔서 쓰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그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 속에, 말씀 속에 있는 말씀인데 예수님이 이미 주신 말씀을 통해서 이 계명들을 다시 한 번 조명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의 원칙에 의해서 이 계명을 다시 조명해 보면 실제로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형제에게 화를 내면 살인이라, 형제를 바보라고 멸시하면 살인이다 고 하셨다. 여기 ‘화’, ‘분노’에 대해 중요한 몇 가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본다. 분노 중에서 소위 ‘의분’이라는 것이 있다. 의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분을 내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도 그런 분노하신 이야기들이 성경에 몇 번 기록되어 있다. 성전이 완전히 장사꾼들의 소굴로 변했을 때 그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성전 마당에서 양을 팔고 소를 팔고 비둘기를 팔고 그래서 돈을 버는 장소로 시장처럼 변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모든 사람들을 다 내쫓는 분노를 보이신다. 그것은 성경의 기록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이 그를 삼켰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씀을 성경은 기록하고 계신다. 그것은 일종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특심한 열심이라고 할까 사랑의 열심이라고 할까 그렇게 표현하면 성서적이다.

죄는 자기 사랑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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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장 17절에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한 말씀은 시편 69편 9절에서 인용한 말씀이다. 예수님에 관한 구약의 예언 가운데 이 말씀이 실제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의분, 의를 위한 분노 말고 자기가 자존심이 상했다든지 자기 욕심에 의해서 분을 내는 경우들이 허다하게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분노는 분명히 자기 사랑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죄는 자기 사랑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거듭거듭 말씀하셨다. 자기를 사랑하는 정신이다.

어떻게 보면 이 분노라는 씨앗이 자라서 결국 살인이나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에 관한 이사야 53장의 기록을 보면 그분은 강포를 행치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폭력이라는 것이 예수님에게 없었다. 예수님의 본성 자체가 사랑이셨기 때문에, 너무 선하셨기 때문에 분노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셨다고 지난번에도 공부했다. 예수님의 본성 자체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그분은 자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손해를 보거나 또는 자존심이 상해서 화를 내시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는 사실이다. 본성 자체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실수가 없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과 이웃만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본성은 화를 내실수가 없으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하신 그 계명을 설명하신 것을 보면 결국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하라는 것이다. 너를 사랑하지 말고, 네 자존심과 이기심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남을 멸시하는 것은 또 다른 자기 사랑의 모습이다. 화는 사실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자극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형제를 멸시하는 것은 본인 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자기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형제를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태워져 없어져야 될 일이다.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를 높이는 교만이 만든 열매이다. 특별히 자기 자신의 신앙의 표준, 종교적 어떤 표준을 가지고 형제를 멸시하는 일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멸시의 반대되는 말은 존경이다. 예수님은 아무리 타락한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양심 없는 철면피 같은 인간일지라도 예수님은 존경과 친절로 대해야 된다고 가르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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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영혼들의 대하여 하나의 영혼이라도 모독하는 말이나 비난하는 말이나 멸시하는 말을 할 때는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모독이고 정죄고 비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누구든지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자기가 스스로 율법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를 스스로 앉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야고보서 4장 11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는 이시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율법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왜 그런가? 율법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까 사랑하지 않으면 율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래서 형제를 멸시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이 율법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우리 자녀들이 엄마, 아빠가 어떤 일을 해라 했을 때 하지 않으면 그 엄마를 짓밟고 그 아버지를 짓밟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의무는 불쌍히 여기고 사랑할 의무만 있지 비난하고 멸시하고 짓밟을 수 있는 권한은 우리에게 없다. 여기 야고보 사도가 말한 그대로 너희는 누구관대,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의 이웃은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아무리 망가진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소유이다. 망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정말 어떤 영혼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 영혼들을 아버지께서 목숨을 버리신 그 귀한 영혼들을 우리가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로마서 14장 4절에 사도 바울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음이라” 우리가 주인이 아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처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 누가복음 15장 17절 이후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도 똑같다. 아버지는 돼지같이 된 아들을 멀리서 보고 뛰어와서 그 아들을 끌어안는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바란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도록 하자.

성경구절

  • 마태복음 5장 21,22절
  • 마태복음 22장 37-40절
  • 마태복음 22장 40절
  • 마태복음 22장 39절
  • 레위기 19장 18절
  • 요한복음 2장 17절
  • 시편 69편 9절
  • 이사야 53장
  • 야고보서 4장 11절
  • 로마서 14장 4절
  • 누가복음 15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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