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영생의 공식

by webmaster posted Mar 17,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강의 오디오 듣기(MP3 다운로드, 데이터 주의)
강의 오디오 듣기(팟캐스트, 데이터 주의)
 

‘영원히 사는 삶’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여름성경학교 때부터 교회에서 종종 듣던 말씀입니다만 이 말씀의 정확한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영생(永生)이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삶’입니다.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삶입니다. 영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는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렇게 유한한 삶의 의미도 잘 모르는데, 무한한 삶의 의미는 더더욱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예를 들어 연인끼리 함께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기 마련입니다. “아,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 역시 하나님과의 사랑의 행복이 계속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사랑하셨다’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아헤브(אָהַב)’입니다. 이 동사는 ‘바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듣기 좋은 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바치는 적극적인 행동이 사랑인 것입니다. 즉,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아니라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아들이 아프면 차라리 자기가 아프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런데 그 귀한 아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독자를 죽도록 내어주는 행동이야말로 이 우주에서 가장 큰 희생이자 사랑일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말지 어떻게 맨 정신에 자신의 아들의 목숨을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공식화 한다면 ‘사랑 더하기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은 본래 ‘맡긴다’는 뜻입니다. 사실 성경 상에서는 많은 경우 ‘믿음’을 ‘맡김’이라고 읽는 것이 훨씬 더 본래의 뜻에 가깝습니다. 머리로만 인정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믿음, 그것이 성경이 본래 말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그 사랑에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때 성경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2장 24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편이 아내에게 자신을 주고 아내가 남편에게 자신을 맡겼을 때 고귀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아들을 주셨을 때 그 아들의 사랑에 우리를 맡기는 믿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이 생겨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생의 공식’입니다. 참으로 자신을 다 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해서 우리를 그 사랑에 완전히 맡김으로 그 사랑 속에서 무한히 누리는 행복한 상태를 바로 영생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단번에’ 혹은 ‘일시에’라는 단어들은 일회성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영원성’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자기를 단번에 주는 것은 영원히 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목숨을 단번에 제물로 바치셨기에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표현할 때에도 ‘단번에’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번에 자기를 주셔서 영원히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유다서 1장 3절에도 똑같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는 말씀은 ‘한번 주시고 도로 가져가지 않는, 영원히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9장 11〜12절에도 같은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이 말 또한 영원히 우리를 위해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주셨다가 도로 가져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말라기 3장 6절에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주신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영생의 공식’은 단번에 주시면서 영원히 주시는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한번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면 영원히 아빠이고 엄마이듯이, 그 자녀들도 우리의 영원한 아들이자 딸이 됩니다. 그래서 ‘단번에’라는 말은 일회성이 아닌 영원성을 가리키는 단어이면서 아주 중요한 구원의 공식이 됩니다.

흔히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성경의 대헌장’이라고 부릅니다. 성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해 놓은 말씀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에서 ‘이는’이라는 단어는 ‘이유는’이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이유는 “저를 믿는 자마다” 빈부귀천과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할 때 본인 스스로 자기의 죄를 책임지고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준엄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이 우리를 영원한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지신다는 사실을 이 성경절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가 이 영생에 함께 참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요한복음 3장 16절
  • 창세기 2장 24절
  • 유다서 1장 3절
  • 히브리서 9장 11〜12절
  • 말라기 3장 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