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죽음과 부활

by webmaster posted Feb 0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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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몸으로 우리를 부활시키셔서 영원히 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씨에 대하여 다루었던 지난 글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왔던 유대인 랍비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해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리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장 5절)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다른 답변을 하지 못하도록 정확하게 증언하고 계십니다. 여기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이 나타나는데, 이렇게 ‘진실로’를 두 번이나 반복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두 번이라는 숫자를 흔히 ‘증언의 숫자(testimonial number)’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한 사람의 증인만으로는 어떤 결정적인 문제를 평가할 수도 판결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진실로’를 두 번 반복하신 것은 복수(複數)의 증인이 증언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만큼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참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진실로(ἀμήν)’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는 ‘아멘(אָמֵן)’이라고 합니다. 물론 아멘은 헬라어로도 그대로 음차(音借)되어 성경 본문에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는 예수님의 인격적 칭호의 하나로 아멘을 쓰고 있습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아멘’으로 불린다는 의미는 예수님 스스로 증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자신도 아멘이십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을 ‘아멘’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도 아멘이십니다. 결국 세 분의 증인이 모인 셈입니다. 그만큼 절대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핵심은 “니고데모야,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즉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단다”입니다.

거듭남은 일단 죽음을 전제하는데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의 의미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바로 그 순간, 본능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던 신앙 본능과 그 마음속에 기록했던 본능적 사랑의 법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법이 사라짐과 동시에 자유도 잃어버렸습니다. 사단의 노예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을 찾아오셔서 “네가 어찌하여 먹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담의 대답은 참 가관이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도 책임이 있다고 따졌습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안 주셨더라면 제가 유혹을 받을 일이 없었는데, 왜 저 여자를 제게 주셨습니까?” 그리고 “저 여자가 저를 유혹했기 때문에 먹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잘못과 책임에서 자신은 완전히 빠지고 하나님과 여자에게 이유를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도 물으십니다. “그럼 너는 어찌하여 먹었느냐?” 하와 역시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왜 뱀은 만드셔서 저를 유혹하도록 하셨습니까? 저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역시 자신은 쏙 빠졌습니다. 놀라운 학습능력입니다. 결국 죄가 이렇게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이 부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던 본능적 사랑의 법이 이렇게 망가졌습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버지, 저의 죄를 아버지께 다시 맡깁니다.” 인류의 선조들이 이런 식으로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선악과 사건 이후 드러난 일련의 상황들을 통해 아담과 하와, 두 사람 다 동일하게 죄의 노예가 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는 그 말씀 그대로, 그들은 그 날 바로 그 시점에 죽었습니다. 그들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죽은 것입니다. 비록 아담이 900년 넘는 세월을 살긴 했지만 그 날 그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 즉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이 아닌 아담 속에 들어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그날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죽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에베소서 2장 1절)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상태를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죽게 된 아담, 마땅히 없어져야 할 죄의 결과, 그 죄와 함께 하나가 된 아담은 그날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죽어야 마땅했던 아담에게 하나님은 “네가 흙이니 다시 흙으로 돌아가리라”(창세기 3장 19절)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이 연장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기 위해 남아있는 것뿐이지 사실은 우리도 이미 그날 그 시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마땅히 죽어야 할 아담과 하와를 대신해서 바로 그날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죽었습니다(요한계시록 13장 8절). 창세기 3장 21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담과 하와를 대신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빌립보서 3 장 21절에 분명히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 날 자기 몸의 영광의 형체와 같이 우리를 변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를 처음 창조하셨던 그 때의 본래 모습으로, 다시 말하자면 죄 없는 유전자로, 죄 없는 몸으로 우리를 부활시키셔서 영원히 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복음 중에 하나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것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거듭거듭 말했듯이,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14절)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소망이 있고 죄가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다시는 사망이 없는, 다시는 죽지 않을 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영원한 소망이요 기쁜 소식, 즉 복음인 것입니다. 아멘!

성경구절

  • 요한복음 3장 5절
  • 요한계시록 3장 14절
  • 창세기 2장 17절
  • 창세기 3장 19절
  • 요한계시록 13장 8절
  • 창세기 3장 21절
  • 빌립보서 3장 21절
  • 고린도전서 15장 1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