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의는 법을 지키는 것

by webmaster posted Jun 1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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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 법을 어겼을 때 언약이 깨졌고 그것을 성경은 ‘불의하다’고 말한다

오늘은 ‘의롭다’고 하는 말, ‘차다크(צךקה)’라는 동사가 성경에 사용된 첫 번째 용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창세기 38장 26절의 말씀 가운데서,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에게 했던 말 가운데 처음으로 사용됩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에게 “그는 나보다 옳도다.”는 말을 했는데, 여기 쓰인 단어가 바로 차다크입니다. 왜 유다가 이런 말을 했을까?

이 이야기의 배경을 잠시 설명을 하면, 유다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큰아들 엘이 다말이라는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얼마 안 되어 엘이 죽고 맙니다. 졸지에 다말은 과부가 된 것입니다. 당시는 형사취수제(兄死取嫂制)라고 해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에게 들어가서 아이를 낳게 해 주어야 하는 법이 있었는데, 이는 사회적으로 보호자가 없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과부와 고아들을 위해 만들어진 관습 중 하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에게 다말을 넣었는데, 형수의 자식이 장자권을 갖게 될 것을 염려한 오난은 형수에게 씨를 주지 않기 위해 땅에다 설정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로 인해 오난도 죽고 맙니다. 결국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에게 다말을 주어야 했는데, 당시 셀라는 장가를 가기에 나이가 어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너는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셋째 아들 셀라가 남자 구실을 할 만큼 크면, 내가 다시 너를 부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셋째 아들 셀라가 자라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유다는 다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다말에게 주었다가 셋째 아들까지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다음에 발생합니다. 유다가 아내와 사별하게 되면서 여인이 그리워 어떤 창녀의 집에 들어가서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것도 아내를 장사지내고 오는 길이었으니, 참 여자가 급했나 봅니다. 관계를 갖고 나서 창녀가 화대를 달라 하니, 수중에 마침 가진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나중에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나한테 주라. 그리고 나중에 보낼 때는 내가 당신 지팡이하고 도장을 가지고 있다가 돌려주겠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창녀를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얼굴을 가린 창녀는 사실 다말이었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된 다말은 유다 집에 유다의 씨를 남겨주는 것이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그 조건을 이루어주지 않자, 다말이 자기 시아버지가 상을 치르고 오는 도중에 길가에 앉아 창녀처럼 얼굴을 가리고 시아버지를 맞아 씨를 받게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때에 임신이 되어 쌍둥이를 갖게 됩니다. 자연히 몇 달 안 되어 배가 불렀을 것이고, 동네에서 소문이 났을 것입니다. 유다보고 하는 말이 “당신 며느리가 외간남자와 몸을 섞었으니 마땅한 벌을 받아야 된다. 며느리라고 해서 저런 더러운 짓을 눈감아주면 안 된다.” 당시 법으로는 간음한 여자는 공터에 데려다가 사람들이 둘러서서 돌로 치던지 아니면 불살라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거칠게 끌고 나오는데, 그녀, 즉 다말이 유다가 관계를 갖고 주었던 지팡이와 도장을 보여주며 태의 주인을 밝혔습니다. “제 아이는 시아버지의 씨앗입니다.” 이때 놀란 유다가 한 마디 남깁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어떻게 보면,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다말은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 된 유다는 며느리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셋째 아들이 다 커서 결혼할 만한 나이가 됐는데도 그의 형수에게 보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집안의 씨를 남긴 다말에게 성경은 ‘의롭다’, 즉 ‘차다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의롭다’라는 말은 며느리와 시아버지와의 언약관계에 있어서 ‘법을 지킨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의를 만든 것은 며느리 다말이었지 유다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불의한 사람, 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었고, 다말은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추잡한 이야기를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왜 기록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댑니다. 그리고는 시아버지하고 관계를 가져서 애를 낳은 며느리가 무슨 의를 이루었느냐 반문합니다. 이 관계를 영적인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 관습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자기의 유전자를 우리에게 넘겨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부자간의 언약이 채결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사람이 깨트리게 됩니다. 우리가 그 법을 어겼을 때 언약이 깨졌고 그것을 성경은 ‘불의하다’고 말합니다. 유다는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불의한 자가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경구절

  • 창세기 38장 2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