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율법의 완성자, 예수님

by webmaster posted Dec 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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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하게 하다’

이번 글에서부터 우리는 ‘율법의 대헌장(大憲章)’이라고 부르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교훈의 말씀을 베푸셨다 하여 ‘산상(山上)수훈’이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영어로는 ‘비에티튜드(Beatitudes)’라고 하는데 ‘지복(至福)’을 뜻하는 ‘베아투스(beātus)’에서 나온 말입니다.

산상수훈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비단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신앙을 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산상수훈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이 많습니다.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나는 기독교인들은 싫지만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5장 17〜18절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법에 비추어 예수님을 율법파괴자(antinomist)로 고발합니다.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율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완전하게 하다’는 헬라어 동사는 ‘플레로오(πληρόω)’입니다. 이 동사는 본래 ‘가득 채운다(fulfill)’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크게 613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태복음 23장 23절)라고 일갈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무겁고 중한 것들은 다 내다버리고 가벼운 형식과 문자만 남겨두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 율법의 모든 것을 “채우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도 분명히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오직 사랑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을 가끔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장 20절)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서 항상 균형 잡힌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형식도 내용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 역시 주님께서는 분명 의라고 인정하셨는데 문제는 그 의를 가지고는 아무도 하늘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부터 다루게 될 이 산상수훈의 내용은 이러한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령을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장 37〜40절) 문자적인 율법의 준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의, 즉 하나님의 본질적 사랑을 설명하신 것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율법은 말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시기도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한 분은 이 세상에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의 목숨을 빼앗아서라도 우리에게 영원한 목숨,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들렸던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장 17절) 왜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사랑하셨을까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라차(רָצָה)’ 혹은 ‘하페츠(חָפֵץ)’라고 하는데 ‘기쁨’이라는 의미와 ‘뜻’이라는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페츠’라는 단어가 이사야 53장 10절에는 ‘뜻’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 여호와의 ‘뜻’(하페츠)은 동시에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이유는 그가 내 기쁨의 뜻을 이루어주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독생자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기쁨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아들마저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선언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세상과 독생자 예수를 맞바꾸신 하나님! 신명기 6장 25절에 분명히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이루어진 상태를 의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율법과 계명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율법은 행동이나 규정, 법문(法文)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예수님 그분이야말로 율법인 동시에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기도는 율법을 완성시키신 기도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 자신을 죽이는 자들까지 용서하신 사랑은 율법을 완성한 궁극의 사랑입니다.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온전히 채우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율법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귀한 아들과 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마태복음 5장 17〜18절
  • 마태복음 23장 23절
  • 마태복음 5장 20절
  • 마태복음 22장 37〜40절
  • 요한복음 10장 17절
  • 마태복음 3장 17절
  • 요한복음 3장 16절
  • 신명기 6장 25절
  • 누가복음 23장 3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