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영이 가난해지는 축복

by webmaster posted Dec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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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번 글에서는 산상수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여덟 가지 축복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2절의 말씀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산의 하나님’이라고 많이 부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은 곳이 시내산이었고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곳도 시내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도 여덟 가지의 복(福)을 이야기하고자 시내산에 오르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산에 임재하셨을까요? 골짜기나 평지가 아니라 유독 산에 임하신 이유는 예로부터 산이 아무나 쉽게 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구별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세속을 떠나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산으로 불러올리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던 그 시내산에 다시 올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복의 근원을 설명하십니다.

산상수훈의 핵심인 팔복은 “복이 있나니”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복’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복’을 물질이든 명예든 현세적인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집에서 더 비싼 차를 굴리며 사는 삶이 복 받은 삶이 아닐까?’ 암암리에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놀랍게도 첫 번째 복이 ‘가난’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는 같은 말씀을 더 노골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행복지수를 조사해 보면 선진국의 기준으로 볼 때 결코 잘 살지 못하는 방글라데시나 부탄 같은 나라의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심령에 그 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심령’은 헬라어로 그냥 ‘영’이라는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 쓰인 ‘영’이라는 단어는 8절 “마음이 청결한 자”에 사용된 ‘마음’이라는 단어와 다릅니다. 3절의 ‘영’은 ‘프뉴마(πνεῦμα)’라는 단어가 쓰였고, 8절의 ‘마음’은 ‘카르디아(καρδία)’라는 전혀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영과 마음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사실 헬라어가 아닌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던 말은 헬라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와 사촌지간인 아람어였습니다. 그 어록을 모았다가 나중에 마태가 글로 옮기면서 헬라어로 번역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단서가 되는 말씀이 스가랴 12장 1절에 등장합니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심령을 지으신 이’라고 할 때 ‘짓다’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야짜르(יָצַר)’라고 하는데 뜻은 ‘빚다’, ‘만들다’입니다. 말 그대로 흙을 주물러서 토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심령’, 즉 ‘영’은 ‘루아흐(רוּחַ)’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 ‘영’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빚으신 ‘영’, 즉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심령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합쳐지면 진정한 ‘영(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며 고린도전서 6장 17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肉)’은 ‘영’과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 또는 ‘육체’는 우리의 영이 마귀의 영과 하나가 되었을 때를 일컫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세기 6장 3절)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육체 속에 영이 존재해서 사람이 죽으면 영이 육을 벗어난다고 가르치는 것은 헬레니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가뿐하게 독배(毒杯)를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헤브라이즘에 기반한 성경은 영은 육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은 영이 가난한 사람이라야 천국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수많은 세속적인 죄의 쓰레기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욕심, 이기심, 시기, 질투, 교만, 살인충동, 훼방, 거짓 등 온갖 더러운 죄가 사람들의 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도리어 그런 사람들을 부자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영이 가난하게 될 때에 천국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법관이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부자 법관에게 버리라고 요구하신 것은 돈이 아니라 그의 영을 지배하고 있던 욕심이었습니다. “너, 욕심이 많구나. 그 욕심으로부터 가난해지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단다.”

우리 모두 영이 가난해지는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이 가난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

성경구절

  • 요한복음 5장 1〜2절
  • 누가복음 6장 20절
  • 마태복음 5장 3절
  • 마태복음 5장 8절
  • 스가랴 12장 1절
  • 로마서 8장 9절
  • 고린도전서 6장 17절
  • 창세기 6장 3절
  • 마태복음 19장